삼국지 초기 반동탁 연합군인 18로 제후군이 지리멸렬하게 무너지고 난 다음 조조는 능력을 발휘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러던 193년, 조조가 원술과 싸우는 중인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 자사 도겸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도겸은 인근의 도적 떼와 전략적으로 연합하고 있었는데 도적 출신 병사들이 영주와 서주의 경계 지역을 약탈하는 못된 짓을 자주 저지르곤 했던 것이다. 조조는 원술 격파를 마친 뒤 가을에 대규모 군사로 도겸을 격파하고 10여 개의 성을 점령하는데, 이 과정에서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조조의 오환 정벌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고생스러웠고 식량과 물이 없어서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으며 가장 사랑하는 책사 곽가마저 잃은 힘든 과업이었다. 그러나 오환 정벌로 청주지역이 완전히 평정되어 하북 지역이 완전히 장악되었다. 공융은 조조가 황제를 직접 위협하는 세력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했는지 허도를 중심으로 천 리 이내에는 제후를 봉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이 일은 조조가 공융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공융이 55세인 208년 1월, 조조가 오환 정벌에서 돌아오자마자 형
공융이 46세가 되던 199년, 조조 제거 시도가 발각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10년 어린 나이에 동탁에 의해 황제가 된 헌제는 어느덧 혈기 왕성한 20대 중반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동탁과 이각-곽사, 조조에게 줄줄이 시달리며 비렁뱅이가 되었었고 꼭두각시 취급받아왔으니 얼마나 속에서 불이 치밀어 올랐을지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 그런 헌제가 조조를 제거하여 황실을 바로잡으라는 혈서 밀지를 옥대에 숨겨 동귀인의 아버지인 동승에게 내린다. 동승은 뜻을 같이하는 유비, 왕자복, 충집, 오석, 오자단 등을 모아 거사를 논의하려 했는
아마도 공융은 20세 전후에 관직에 나간 것 같다. 당시 사도(사마, 사공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의 관직. 주로 민정 부분을 담당했으며, 실질적으로 승상 대우를 받았음) 양사가 추천해서 사도부 소속 관리로 재직하는 동안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많이 적발해서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관인 상서가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결재해 주지 않고 도리어 공융에게 면박을 주었다. 한나라 말 환관의 득세 상황 꼬라지가 훤히 보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비리를 정연히 진술했다니 공융은 제법 꼬장꼬장하고 타협하지 않는
얼마 전 지인이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에서 올려 본 밤하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후두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 별 무리를 보며 호흡이 멎는 황홀함과 신비로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밤하늘을 올려 보면 별이 저리도 많다니, 저리도 가까이 있다니 하고 절로 경탄하게 된다.철이 들며 깨달은 것은 나보다 못난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읽으면서 세상에 잘난 사람과 뛰어난 사람이 하늘의 별처럼 넘친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에 대한 글을 읽으면
주윤발 유역비 주연의 은 손에 잡은 권력의 크기만큼 긴장과 고민, 갈등이 컸던 조조를 일반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서 보는 영화다. 한나라에 대한 역적이 아니라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실제의 역사적 사실에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을 상상으로 메꾸고 이은 팩션(Faction = Fact + Fiction) 영화인 것이다. 영화란 것이 원래 설명보다는 보여줌으로써 느끼게 하는 힘이 큰 매체여서 당시의 맥락 내용을 미리 아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큰 자극을 주는 의미 있는 영
후계자 경쟁은 이기는 것보다 의사결정자의 기준 충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경쟁에 이기고도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겨난다. 즉 의사결정권자의 기준과 의도를 얼마나 잘 파악하고 충족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삼국지를 보면 경쟁의 시작은 조비가 앞서 있었다. 장자 승계의 원칙에서 유리했고, 25살부터 오관 중랑장을 역임하며 경험도 많이 쌓았다. 순욱을 비롯한 많은 대신이 지지했다. 특히 조식의 처가 어른이었던 최염도 조비를 지지했다. 최염이 충고를 하자 조비가 고개를 숙이면서 그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여 사냥을 그만두
몇 해 전 아들이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는 날이었다. 수료식장 주변은 3주간의 훈련을 마친 아이의 모습이 궁금한 부모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 비슷한 마음이라 말 붙이기가 쉬웠다. 가까이 계신 분께 "우리 때보다 훈련이 많이 쉬워졌는데도 약해진 아이들이라 견디기 힘들어하네요"라며 말을 걸었다. 그때 그분의 대답이 아직도 선명하다. "훈련이 아무리 쉬워졌어도 힘들게 느껴지는 건 우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고통의 크기는 가해진 힘의 크기가 아니라 받은 느낌의 총량이다. 현재 밀레니얼들이 느끼는 막막함, 애를 써도 반복되는 실망
우리 주변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기인들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진다. 오래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뛰어남을 넘는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어떤 의미 또는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역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예형(禰衡)은 삼국지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다. 도리어 사소한 인물에 가깝다. 그러나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 북 연주를 잘했고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했으며 특히 살인적인 독설가로서 고작 26년을 살았을 뿐인데 2
관우의 실패가 성공의 절정기에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교훈적이다. 당시 삼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조의 위나라는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 손실이 커져 있고 조직 내의 문제도 산적해 있었다. 손권의 오나라도 지방 토호 세력의 영향으로 응집된 국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촉한이 가장 안정되고 유리한 상황이었고, 관우도 과감하게 조조의 영토를 공격해서 큰 전과를 여러 번 올리기도 했다. 국가의 팽창이 시작되던 때였다. 그런데 선봉장인 관우가 무너지면서 교두보인 형주를 잃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촉의 짧은 우위 상황
가장 충실한 참모가 방해물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삼국지 속 조조와 순욱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뛰어난 참모인 순욱은 자신이 모실 주군으로 조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순욱은 수많은 대상을 연구하고 비교했을 것이다. 조조의 참모가 되기로 했을 때 순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군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꿈을 이루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분명한 한계가 있다. 조직의 방향과 목적,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주군이기 때문이다. 만일 주군의 마음이 달라지거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참모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삼국지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는 누구일까? 제갈공명?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제갈공명의 촉나라는 가장 먼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에 비해 위나라는 삼국을 통일해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그 승리의 기틀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순욱을 최고의 참모요 보조자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그는 활동하기 훨씬 전부터 왕좌지재(王佐至材)라고 소문난 인재였다. 외척과 내시의 세력에 밀려난 호족 세력들은 자신을 청류파, 외척과 내시들을 탁류파라 불렀다. 그리고 천하 제패를 할 만한 인물의 참모가 되려고 찾아다녔다. 원소도 호족 세력의 배경을 가지고 있
초기 성공적으로 형주를 안정시킨 유표는 지속가능성 확보란 숙제를 맞이한다. 당시 세력 구도를 보면 중앙정부는 조조가 장악했고, 원소는 이미 최대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남의 원술, 강동의 손책도 세력 확장에 힘쓰고 있었다. 멀지 않은 미래, 이들 간에 충돌과 재편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도 유표는 ‘형주는 인물과 식량이 풍부하고 누구의 침입도 막아낼 군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안주했다. 그러다 얼마 후 유표는 급격한 건강 악화를 맞이했다(차남 유종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채 부인의 독살 음모라고는 말도 있다). 그제야
리더의 실패는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권력자가 직접 속한 조직은 더 크다. 삼국지 초기 선두주자들의 실패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자신을 가다듬고 조직을 이끌었다면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초기 선두주자 중 하나였던 유표 역시 그러했다. 삼국지 속 유표는 중앙무대에서 벗어나 있어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조조와 유비가 천하의 영웅이 누구인가 대화하는 중에도 나오고 관도대전에서 조조와 원소가 절체절명의 대결을 벌일 때도 나온다. 두 영웅이 얼마나 유표를 신경쓰는지만
삼국지 속 원소와 관도대전을 보면 조직에 있어 붕당의 위험을 떠오르게 한다. 조직 내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며, 도리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붕당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더 건강하고 창의적인 조직이 되려면 도리어 다양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붕당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각자 다른 생각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비슷한 생각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끼리끼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 힘이 결합하면 붕당이
절대적인 우위였는데도 처절하게 패한 원소는 고작 800여명의 기병만 이끌고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부잣집이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있듯이 완전히 괴멸된 것은 아니었다. 패잔병들이 속속 기주로 돌아왔고 장남 원담이 청주에서 5만, 차남 원희가 유주에서 6만, 그리고 조카 고간이 병주에서 5만을 이끌고 와서 총 16만 병력이 만들어졌다. 충분히 전열을 가다듬어서 심기일전할만했다. 그런데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조조군이 쳐들어왔다.준비가 부족하고 사기가 낮아서일까, 원소는 다시 아들 삼 형제만 데리고 도망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관도대전은 적벽대전과 쌍벽을 이루는 삼국지 속 최대 전투다. 천하 권력 판도의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전투다. 이때를 정점으로 대권의 선두주자인 원소가 무너지고 조조-유비-손권이 주도하는 삼국시대가 막을 올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도대전 속 원소를 보면 리더십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다. 첫째, 반드시 강자가 전쟁에서 이기지 않는다. 원소군은 조조군에 비해 거의 10배나 컸지만, 전쟁에서 참패했다. 역사 속의 많은 전쟁도 그렇다. 대부분 강자가 전쟁을 시작한다. 약자는 살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이때 강자의 가장 큰 약점은 교만과
삼국지 속 원소는 실패한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다. 앞서 여양전투에서 원소란 인물이 지닌 리더십의 한계와 조직의 상한선을 살펴봤다면,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관도대전에서는 리더의 결정이 조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있다. 리더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누구보다 더 많이 조사·분석하고 평가·반성해야 한다. 삼국지 속 원소는 어땠을까. 라이벌 조조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놓치고 여양전투에서 성과 없이 돌아온 원소는 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조조에 대한 공격을 서두른다. 그러나 원소의 부하들은 찬반
삼국지 속 떨어진 별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원소다. 그는 출신 배경부터 남다르다. 사세삼공(四世三公-삼대에 걸쳐 황제를 직접 모신 삼 공을 배출) 가문 출신에다 잘 배우고 매우 유리하게 출발했다. 젊을 때는 무리를 끌도 다니며 사회적 물의(요즘 재벌이나 고위층 자제의 뉴스와 비슷한?)도 좀 일으켰던 것 같다. 당시 권력층들이 시대와 권력에 저항하는 불손한 면이 있다고 보았다 하니 말이다. 당시 한나라는 위에서부터 철저히 썩어 있었다. 문고리 세력이 황제를 에워싸고 국정을 농단했고 백성의 삶을 돌보는 민생은 간 곳이 없었다. 탐